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100년 동안이나 버려졌다가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주전 44년에 재건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은 주후 50년 어간인데, 당시 도시의 인구는 8만 정도였고 이제 90년 정도의 새로운 역사를 가진 젊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는 빠르게 성장하여 제국 내에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 이어 세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경제 기적을 일구어 많은 도시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스포츠와 유흥문화가 발달되었고 여행과 성산업과 종교적 다원주의 그리고 물질주의가 편만했습니다. 고린도의 이런 점이 오늘날의 캘리포나아와 유사해서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목사님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캘리포니아 전서와 후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단 이것은 캘리포니아와 유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경향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그의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행 18:1~17). 그리고 에베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왔을 때 거기서 고린도전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고린도를 떠난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하기 위해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16:1~11). 그러나 그 사이에 디모데를 보냈고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본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과 거짓 교사들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고린도를 계획과는 달리 잠깐이라도 방문하여 교회의 징계문제를 다루려고 2차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고통스런 방문’이 되었습니다(고후 2:1). 그들은 사도의 권위 자체를 문제삼았고, 바울 사도의 사역과 인격에 대해서까지도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진짜라면 왜 그렇게 그의 삶에는 고난이 많은가? 왜 그의 사역은 다른 ‘지극히 큰 사도(super-apostles)’들과 비교하여 활기가 없는가? 왜 그의 설교는 와닿는게 없는가? 왜 그는 하나님이 자기 삶을 인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가? 왜 그는 다른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사례를 받지 않는가? 그가 모금한다는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왜 그는 다른 사도들처럼 추천장이 없는가?
고린도 교회의 바울 사도에 대한 비난과 의심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받은 ‘다른 복음’(고후 11:4)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심히 상처를 받고 2차 방문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회개를 촉구하며 심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습니다(고후 2:4). 이 편지는 잃어버려진 편지로 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린도교회는 그의 편지를 읽고 회개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다시 바울과 그의 복음에게로 돌이켰지만 여전히 그의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하기에 앞서 이제 고린도후서를 쓰게 됩니다. 이 때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의 3년의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로 갔을 때였습니다. 아마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에서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고린도후서를 읽고 상고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배경들을 볼 때 우리는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쓴 가장 감정이 깊이 배어있는 편지임을 알게 됩니다. 


출처; http://bethshalomchurch.net/rgboard/view.php?&bbs_id=jbrc&page=&doc_num=82



Axact

장영식 (Yong S. Chang)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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